▲ 권영국 변호사(전 민변 노동위원장) |
지난달 27일 노동법률단체 소속 변호사·노무사·법학교수들이 서울 새문안로 경제사회노동위원회 건물 앞에서 “노동법 개악 저지! 탄력근로제 경사노위 합의 철회!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 촉구!” 단식농성 기자회견을 가진 후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노동법률가들이 단식농성에 들어간 직접적인 계기는 지난달 20일 탄력근로제 단위기간을 최장 6개월로 확대한다는 경사노위의 ‘노사정 합의문’ 발표에 따른 것이다.
탄력근로제 확대 합의문이 발표되자 대다수 언론과 정치권은 노동문제에 대한 사회적 대화의 첫 합의 내지 첫 성과물이라며 환영했다. 반면 경사노위 참여를 거부한 민주노총은 탄력근로제 노사정 야합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고, 경사노위에 참여한 한국노총은 “사회적 대화의 길이 열려 있고 참여할 수 있음에도 참여하지 않고 반대만 하는 것은 무책임의 극치”라고 비판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위 합의가 있던 날 청와대 참모들과의 차담회에서 “사회적 합의를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는 과제들이 많은데 이번 합의가 자신감을 줬다”며 “ILO 핵심협약 비준 문제에 대해서도 소중한 성과를 낼 것으로 기대를 걸어도 좋을 것 같다”고 밝혔다. 탄력근로제 확대 합의안에 대해 민주노총을 제외하면 대부분 환영 일색인 듯한데 당사자도 아닌 노동법률가들이 단식농성에 나선 이유가 뭘까?
이번 합의안 발표는 중대한 절차적 위법성을 내포하고 있다. 정부 정책 거수기 역할을 한다는 비판을 받았던 노사정위원회 대신 출범한 경사노위는 “노사가 중심이 되고 참여주체를 청년·여성·비정규직 및 중소·중견·소상공인 등으로 확대하며, 의제별·산업(업종)별 및 지역별 대화 체제를 강화하는 새로운 사회적 대화기구를 출범시키자는 합의”에 따른 것으로 노·사·계층별 대표를 두고 취약한 대표성을 보완한 것이라고 홍보했다.
경제사회노동위원회법에 따르면 경사노위 합의안으로 발표되기 위해서는 의제별위원회 논의를 거쳐 본위원회에서 심의·의결해야 한다. 그런데 경사노위 17명의 본위원회 위원 중 과반수인 여성·청년·비정규직 근로자대표 3인, 중소·중견·소상공인 사용자대표 3인, 공익위원 4인에게는 의제별위원회(노동시간제도개선위원회)의 탄력근로제 확대 논의 결과에 대한 보고는 물론 협의한 바도 없었다. 한국경총·대한상공회의소·정부·한국노총만이 참여하는 노동시간제도개선위에서 1박2일간 졸속 협의를 거쳐 마련한 안을 경사노위 합의안으로 둔갑시켜 발표했다. 이는 경사노위법을 정면으로 위배한 것이다. 노동시간제도에 대한 사회적 대화를 정부와 재계 그리고 하나의 노조 중앙조직인 한국노총 간 협의로 전락시켰다. 결국 경사노위가 보완했다고 자랑한 다양한 취약계층 주체들과의 사회적 대화는커녕 사전 보고의무조차 정부 스스로 걷어차 버린 것이다. 정부와 재계, 그리고 한국노총의 합의를 사회적 대화로 둔갑시키고 이를 관철해 왔던 노사정위와 다를 바가 무엇인가?
합의안 내용을 살펴보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첫째, 탄력근로제 논의 과정에서 단위기간 최대 6개월 확대 필요성에 대한 소명이 부족해 추가 입증이 필요하다는 점에 재계를 제외한 모두가 동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 바 무엇을 근거로 전 산업에 대해 단위기간을 6개월로 확대한 것인지 분명치 않다. 재계 요구를 일방적으로 수용한 의혹을 갖게 하는 부분이다.
둘째, 3개월 초과 탄력근로제 도입으로 우려되는 노동자 건강권 보장을 위해 근로일 간 11시간 연속휴식시간을 의무화하되, 불가피한 경우에는 근로자대표와의 서면합의가 있는 경우에는 이에 따른다고 했다. 이 조항은 두 가지 점에서 심각한 문제점을 갖는다. ① 근로기준법은 최저의 노동조건을 정해 이를 지키게 하려는 강행법규다. 그런데 근로자대표와의 합의로 강행규정 적용을 배제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법 제정 이래 견지해 온 근로기준법의 강행법규성 원칙을 노사합의로 허물어뜨리는 선례를 남긴다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② 근로자대표와의 합의 조항은 민주적인 노조가 교섭대표노조로 있을 때나 의미가 있는 것인데, 90%가량 노동자의 무노조 현실을 고려할 때 압도적 다수 노동자들에게는 무의미한 조항이다. 사용자 의도에 따라 11시간 연속휴식시간 규정이 무력화될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셋째, 탄력근로제 단위기간을 6개월(26주)로 확대할 경우 11시간 연속휴식시간을 보장한다고 하더라도 1주 평균해 52시간을 초과하지 않으면 노동을 시킬 수 있으므로 13주는 주 64시간(52+12), 나머지 13주는 주 40시간(52-12) 노동이 가능하게 된다. 고용노동부의 과로사 인정기준인 ‘발병 전 12주 동안 업무시간이 1주 평균 60시간(발병 전 4주 동안 1주 평균 64시간)을 초과하는 경우’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합의안은 노동시간단축을 통한 과로사 방지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건강권을 보장한다는 미사여구 뒤에서 과로사를 부추긴다.
넷째, 3개월을 초과하는 탄력근로제의 경우 근로일별 근로시간을 정하는 대신 주별로 근로시간을 정하고 사용자가 예측하지 못한 업무량 급증 등 불가피한 사정이 발생한 경우 정해진 단위기간 내 1주 평균 근로시간을 유지하면서, 근로자대표와의 협의를 거쳐 주별 근로시간을 변경할 수 있도록 했다. 결국 사용자가 예측하지 못한 불가피한 사정이란 사용자에게 주관적인 재량을 부여한 것이나 다름없다. 3개월 초과 탄력근로제가 도입되면 일별이 아닌 주별로 근로시간을 정하면 되고 그마저도 근로자대표와 합의가 아닌 ‘협의’만 하면 주별 근로시간을 변경할 수 있다. ‘일과 가정의 균형과 조화’를 강조하며 도입한 주 52시간제 근로기준법 개정 취지는 소멸한다. 근로일 직전에 일별 노동시간을 통보하기만 하면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은 사용자가 정하는 대로 춤을 추게 된다. 생체리듬은 물론 가족들과의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것도 사치가 될 수 있다.
다섯째, 탄력근로제 오남용을 방지하기 위해 임금보전 방안을 마련해 노동부 장관에게 신고하게 하고 미신고시 과태료를 부과하되, 근로자대표와의 서면합의로 임금보전 방안을 마련한 경우에는 예외로 한다고 했다. 임금보전 방안과 관련해 구체적인 방법과 기준이 없다. 근로자대표와 매월 1만원을 보전한다는 합의안을 만들어 신고하면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게 된다. 있으나 마나 한 규정에 불과하다. 총량으로 예전과 같은 시간을 일하더라도 임금축소는 불가피해 보인다. 사용자는 간접적으로 임금감축 이익도 누릴 수 있게 된다. 누구를 위한 합의안인지 이제 정체가 분명해졌다. 노동개악 시도를 더 이상 사회적 대화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지 말라.
권영국 labortoday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